"처음의 기록들: 한국 섬유사"
Field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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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대 속에 숨겨온 목화씨 한 줌에서,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한 나일론까지. 우리 삶을 바꾼 섬유의 '최초' 순간들을 문익점부터 코오롱의 시작까지 따라가 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물레와 베틀로 삼베·모시·비단·무명 같은 천연섬유를 짜왔다. 주로 부녀자들의 손을 거친 가내수공업이었다. 그러던 섬유가 우리 생활에 혁명을 가져오고, 일제강점기와 6.25를 지나 근대 산업의 근간이 되기까지 — 그 사이에는 의미 있는 '최초'의 기록들이 있다. 오늘은 그 처음의 순간들을 따라가 본다.
문익점 —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 도입

우리나라 최초의 목화 도입은 공민왕 13년(1364년), 문익점이 원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붓대 속에 목화씨를 숨겨온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이색이 남긴 시 <영목면포>를 보면, 원나라와의 교류로 목화씨가 들어올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황제의 하사품이나 사행 무역을 통해서도 들어왔을 테니, 문익점 이전에도 목화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문익점의 도입이 '원년'으로 기억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목면이 대중화되려면 씨 뽑는 기구와 실 잣는 기구의 보급이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그 기기의 도입과 보급을 목화 재배와 나란히 시도한 이가 바로 문익점과 그의 장인 정천익이었다. 씨앗만이 아니라 '만드는 방법'까지 함께 들여온 셈이다.
목면은 우리 생활 문화에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다른 직물보다 따뜻하고 생산성이 좋아, 옷감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무명옷 만드는 법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전하며 100년도 안 돼 온 나라에 퍼졌고, 신분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대체로 무명옷을 입게 됐다고 한다.

나아가 금과 은이 나지 않던 우리나라에서 무명은 돈처럼 쓰였다. 물물교환과 화폐의 수단이 됐고, 일본과 중국에 내다 파는 주요 수출품이 되기도 했다. 국가가 앞장서 보급한 목면은 우리 민족의 생활을 넓히고 풍요롭게 만든 계기였다.
경성방직주식회사 — 최초의 민족계 근대 방직 기업
우리나라의 근대 섬유 기술은 19세기 후반, 개항으로 외국 면직물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조선 정부도 면방직의 근대화를 꾀하며 기기와 기술 도입에 나섰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식민지 공업화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일본에게 조선은 제품을 파는 시장이자 원료를 얻는 기지, 그리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할 생산 거점이었다. 그렇게 일본 면방 자본이 처음 들어온 것이 1917년, 미쓰이 재벌이 조선총독부의 협조로 세운 <조선방직공업주식회사>다.

조선방직은 당시 최신 설비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면방직공장'이었다. 면방적기 15,200추와 직기 610대를 갖추며,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근대적 방적 설비를 경험하게 됐다.
그런데 조선방직이 문을 연 바로 그해, 일본이 독점하던 근대 직포업 시장에 도전하기 위해 민족계 자본 기업 <경성방직주식회사(경방)>가 창립된다. 16,000평 부지에 400여 평 공장과 100여 평 직공 기숙사를 갖춘 대규모 공장이었다. 무엇보다 순전히 우리 기술자와 직공의 힘으로 세워진 첫 근대 방직 기업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조선방직이 일본인 기술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면, 경방은 일본에 파견돼 기술을 익힌 현득영·유덕호가 공장을 돌렸고, 이들이 직공을 훈련시키며 빠르게 생산성을 끌어올렸다. 비록 초기 광목 품질은 조선방직보다 떨어졌지만, 경방은 대규모 공장제 공업으로의 전환을 가속했다는 점에서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인에게 직업을 주고 공업적 훈련을 한다"는 창립 취지 그대로, 경성방직은 조선인 기술자의 양성소 역할도 했다.
한국나이롱주식회사 — 우리나라 최초의 나일론 생산
6.25 전쟁 직후, 대부분의 옷은 금세 닳고 오염에 약했다. 여성들은 매일같이 남편과 자식의 옷을 빨고, 구멍 난 양말 뒤꿈치를 수시로 꿰매야 했다.
그런 고단한 살림에 '나일론'이라는 합성섬유가 소개된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며, 명주보다 곱고 저렴한 데다 질기기까지 한 나일론은 그야말로 신세계라는 평을 받았다. 이 나일론을 국내에서 처음 생산한 기업이 '한국나이롱주식회사'다.

창업자 이원만은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1935년 '아사히공예주식회사'를 세워 작업 모자를 생산해 크게 성공하는 등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귀국해, 일본에서 접한 나일론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1954년 '개명상사'를 세워 수입 판매를 시작했다. 사업이 잘되자 3년 뒤인 1957년, 대구 신천동 뽕나무밭에 자본금 2억 원을 들여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세우고 나일론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그가 나일론 공장 설립을 결심하고 귀국했을 때의 심경은 이랬다. "한국에 합섬 공장을 처음 세울 생각을 하니 온몸이 떨리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다짐도 남겼다. "나는 우리 동포에게 의복을 주자고 결심했다. 헐하고 질긴 옷을 입히고, 부녀자를 빨래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양말 뒤꿈치를 꿰매는 고역의 삶을 편한 삶으로 바꾸려 했다."
나일론 생산으로 '현대판 문익점'이라 불린 이원만은 홍콩·이란·아프리카·미국·동남아 등 해외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우리 수출 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한국나이롱주식회사는 또 다른 공장인 한국폴리에스텔과 통합해 '코오롱그룹'이 됐고, 오늘의 코오롱인더스트리로 성장했다.


섬유 수출의 시작 — 동광 메리야스, 천우사, 삼도물산
우리나라가 섬유를 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957년이다. 126만 7천 달러로 출발해 1967년에는 1억 3,700만 달러를 돌파하며 처음으로 1억 달러대에 올라섰다.

통계상으로는 1951년 생사와 마 등 110만 달러가 일본에 수출된 것이 첫 기록이지만, 섬유업계는 1957년 면사와 면직물 수출을 공식적인 첫 섬유 수출로 본다. 1950년대 초의 수출이 대부분 자연 상태의 원료였던 데 비해, 가공된 직물류 수출을 진정한 첫 수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판단에서다.
의류 수출은 1961년, 무역회사 천우사의 전택보 회장과 삼도물산의 김만중 회장이 보세가공으로 시작해 개당 4달러짜리 바지를 내보낸 것이 처음이었다. 스웨터는 1959년 동광메리야스(혜양섬유의 전신)가 미국에 300장을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1960년 스웨덴에 3,600장을 처음 수출했다.

처음이 만든 오늘
지금까지 우리나라 섬유 역사의 의미 있는 '최초'들을 살펴봤다. 삶의 질을 편하고 풍요롭게 바꾼 사건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늘을 일군 선조들의 노력 앞에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든다.
붓대 속 목화씨 한 줌, 뽕나무밭에 세운 나일론 공장, 개당 4달러짜리 바지 한 벌. 지금 보면 소박하기까지 한 이 '처음'들이 쌓여 오늘의 옷이 됐다. 우리가 매일 입는 작업복 한 벌에도, 그 긴 역사가 실오라기처럼 엮여 있다.
아직 우리가 모르는 의미 있는 '최초'의 기록들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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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DS & PHOTOGRAPHY BY WOO JIN JANG
PRODUCED BY FIFTY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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